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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의 역사] 시드니 호머, 리처드 실라

 

15세기와 16세기 : 이탈리아인이 복잡한 민간 국제 금융체계를 발달시킴.

* 이탈리아 금융기법 : 현금은 약간만 보관하고 나머지 대부분을 다른곳에 빌려주거나 투자

 

17세기 : 네덜란드인이 자치 도시와 주, 국가의 재산을 담보할 수 있는 당국 능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효율적인 국가금융체계 발달시킴

* 네덜란드 금융기법 : 장기채권 원리. 부의 대규모 자금융통을 쉽게하고, 투자활동을 촉진하고, 도시 상인들의 부를 키울 기회를 주고, 전쟁자금 쉽게 동원

 

18세기 : 영국이 이탈리아의 금융기법, 네덜란드의 장기채권 원리와 개념을 더욱 발달시킴

* 영국의 보완된 금융기법 : 발행채권에 규모와 기간을 확실하게 명시 + 대량채권발행으로 공채의 통일성과 상호교환성 확보 => 국가 신용을 효율적으로 창출해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됨

=> “국민의 저축 자금을 동원해 당국의 상업적, 국가적 목적 달성!

· 18세기는 투기의 시대. 수많은 기업이 설립되고, 기업의 주식도 활발히 거래됨. 신용팽창.

- 이탈리아는 이미 유럽 금융의 패권과 주요 시장들을 잃어버림

- 스페인은 이처럼 발달한 금융시장을 가져본 적도 없음

- 따라서 유럽 대륙 금리연구의 초점은 프랑스와 네덜란드.

 

· 프랑스

- 산업화와 거리가 멂. 길드가 여전히 상권 장악. 전체적으로 추세변화가 심한 혼돈의 시기.

- 전쟁과 혁명으로 어수선한 시기임에도 채권 투자(랑트; 장기공채) 인기. 따라서 유동성저축이 주로 국채로 몰렸으나, 이어지는 19세기에는 이런 자금이 좀 더 다양한 유형의 증권으로 몰려듦.

* 19세기에는 장기 유가증권을 십분활용해 저축자금을 투자자금으로 전환하는 방법으로 생산성을 높였음

 

· 네덜란드

- 17세기에 세계 무역 강대국이었음. ‘세계의 운송업자, 무역중개인, 유럽의 중간상’.

- 암스테르담이 유럽의 금융 중심지가 됨. 금리는 유럽에서 가장 낮음.

- 18세기가 되며 상업적 패권 잃음(런던 등의 상업강국들 등장) 네덜란드 산업의 중심이 무역에서 금융으로 옮겨갔음.

- 18세기 암스테르담거래소에서 선물계약, 증거금, 공매도같은 수많은 기법과 개념들이 등장. 외국증권도 거래

- 그러나 네덜란드의 장기공채들은 서로 이질적이고 영국 콘솔처럼 상호교환 가능한 통일성이 없었음.

- 18세기 런던금융시장에서는 네덜란드 자본이 매우 중요한 역할. 환율도 런던에 유리한쪽으로 움직임 -> 네덜란드자본은 수차례 금융위기마다 영국파운드와의 교환가치를 지지해줌.

- 18세기 말 네덜란드 금융위기로 영란은행으로부터 구제금융받고, 네덜란드인들은 자국 증권뿐아니라 영국증권까지 투기 대상으로 삼아 결국 암스테르담은행은 자사의 부채를 갚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함.

- 결국 런던이 더 안정적이고 큰 금융시장이 되어(런던이 암스테르담보다 안전투자수단에 대한 수익률이 더 높아 네덜란드 자본이 런던시장으로 유입) 18세기 말에는 런던 금융시장이 암스테르담 시장을 대체. 

 

4. 19세기 : 19세기는 거의 10년주기로 금융위기가 닥침 

· 1815을 기점으로!

- 1815 이전 : 전쟁, 극심한 금융압박, 고금리

- 1815 이후 : 평화, 경화, 산업발달, 금리하락

 

· 영국

- 경제적 급성장, 금리하락. 인구 4배 증가, 상업규모 14배 증가. 영국의 시대.

- 금본위제, 자유로운 시장접근, 투자 존중과 같은 게임의 규칙 만듦.

- 대규모 공장 건설. 1849년부터 런던으로 금이 대량유입(from 미국, 호주) -> 처음에 금리가 하락했다가 이후 상승해감. 영국은 유럽과 미국의 철도사업에 자금투자, 주식투기열풍 거세어짐, 엄청난규모의 대출금이 국외로 빠져나감.

- 1857년 사상 최초의 범세계적위기인 bank run이 영란은행에서 발생함.

- 조선산업호황, 채권신규발행, 아프리카 금광, 외국채권투자 급증, 투자신탁 구성.

- 19세기 마지막 10년동안 공개시장할인율은 내내 2%를 밑돌다가 결국 1% 밑으로 떨어짐. 국채수익률이 2.5%를 밑돎으로서 영국은 진정한의미의 네덜란드금융을 달성한셈.

  

  · 프랑스

- 영국과는 달리 19세기 프랑스 정치사는 안정성과 거리가 멀고, 금융역사도 영국보다 파란만장함.

- 정권 및 통치체제에 혁명적인 변화가 있을 때마다 장기금리는 급상승.

- 정치적 위기 상황이 지나가면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고 다시 저금리 시대로 복귀 

 

· 네덜란드

- 18세기 후반의 금융혼란기, 프랑스 통치받던 시기가 끝나고 네덜란드는 곧바로 이전의 안정적 금융정책 체계로 복귀. 프랑스나 영국방식대로 장기국채가 하나로 통합.

- 프랑스 + 영국 + 네덜란드의 mixing된 금융체제 -> 이러한 금융시스템의 기원을 밝히는 과정자체는 닭이 먼저냐 아니면 달걀이 먼저냐!

 

· 벨기에 : 1831년 네덜란드로부터 분리되어나옴. 

· 독일 : 담보은행이라는 독일 특유의 금융기관 설립.

식민지 미국의 신용과 이자율의 역사는 혁신의 역사라기보다는 적응의 역사!

영국인 이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올 때 17세기 영국의 신용과 이자에 관행을 함께 들여옴.

미국은 채권자에게 유리한 있는 영국의 법률들을 그대로 채택함.

 

1600~1700년대 식민시절을 거쳐 1789년에 새로운 독립국으로 미국이 거듭남.

1792~1815유럽전쟁동안 미국 농산물가격이 급등. 이러한 상황이 신생국인 미국이 부를 거머쥘 수 있는 토대가 됨. 주요 상품의 가격은 정화 가치를 기준으로 75~100%로 상승하고, 일부상품은 현대와 거의 맞먹는 수준으로 가격 상승.

1812 미국과 영국의 전쟁.

1812~1814전쟁으로 신용경색과 정치적 불안정을 경험하게 되었으나 경제번영의 걸림돌이 되진 않았음.

1815년 이후(유럽전쟁 끝!) 미국제품 수요 지속적 증가

전후 유럽에서 발생한 물가하락현상이 미국에 전파되어 미국주요상품 가격이 50% 하락해 1792년 물가수준으로 되돌아감.

1833년 다시 경기호황 시작. 신용을 담보로 운하, 도로건설 자금조달, 철도건설경기 활기. 토지투기열품. 물가상승. 외화유입

 

19세기 미국의 경제사는 경기 과열과 금융 재앙의 연속’. 호황기 속에 투기와 부정, 폰지 금융의 싹이 틈. 그러다 공황이 찾아오고 금융구조는 무너지며, 평생을 노력해 얻은 결과물은 한순간에 사라짐. 뒤이어 불황과 침체.

 

* 시장추세 가늠지표

1798~1863년까지는 액면가에 근접한 가격으로 거래되고있던 국채 수익률이 시장추세를 가늠할만한 좋은 지표였음.

1865년 남북전쟁 종료(북부군 승리). 평화로운 시기 시작. 금가격 하락, 종류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채권가격 하락. 20년동안의 시장추세를 가늠할 지표로는 지방채의 평균수익률이 유일함.

19세기 말(1885년이후)에는 우량장기철도채권이 우량채권의 시장수익률을 가장 정확히 대변해주는 지표로 인정받음.

 

* 단기물 금리수준

런던 은행가들은 본래가 상인이었음.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우량단기어음이 비싼가격으로 거래될 수 있는 시장이 항상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영란은행 덕분에 목적달성.

그러나 분권화된 19세기 미국의 금융시장에서는 공동준비금, 국가 통화정책의 수단, 최종 대출자 등을 기대할 수 없었음. 결과적으로 유럽의 다른 금융중심지와 비교해 단기금융시장의 금리변동폭이 상당히 컸음.

1899년 당시 뉴욕증권거래소의 콜금리는 낮게는 연10%에서 높게는 연186%로서 그 편차가 극심함.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시기에 우량장기지방채와 회사채의 수익률은 최저 0.37%에서 최고 3.23%의 범위를 나타냄.

 

* 전반적 금리변동

낮은수준의 금리네덜란드 17세기, 영국 18세기 초에 경험. 19세기 중반에는 유럽 대다수국가가 낮은금리 수준 유지. 네덜란드 금융이 미국에도 도달(1880~1900)

1900~1989년 세계주요금융중심지의 이자율역사를 살펴보면 사상 최고 금리도 사상 최저 금리도 모두 이 기간에 경험함.

규모가 커지고 효율성이 증대된 신용시장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확고히했으나, 자본을 제한없이 공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장의 능력을 과잉소진했음. 신용시장에서 나타나는 고도의 효율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과도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음.

1946역사상 최저수익률 기록. 우량회사채 평균수익률 2.37%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는 미국이 세계를 주도했으나, 1960년대 후반기동안 미국이 흔들리기 시작함. 극심한 인플레이션 도래.

1965년 이후 25년동안 인플레이션이 맹위를 떨치고 국제 통화 구조가 재편되면서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거의 모든 국가에서 현대 역사상 최고수준으로 금리가 치솟음.

 

미국은 생산보다는 소비를 촉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음.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악성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계기가 됨.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던 1981년에 미국 정부는 세율은 크게 인하했으나 지출은 줄이지 않았음. 그 결과 1980년대 내내 재정 적자에 허덕였고 국채 규모는 세 배 이상 증가함. 미국은 세계최대 채권국에서 어느새 세계최대 채무국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음.

 

1914~1918 1차 세계대전

1933~1938 뉴딜정책

1939~1945 2차 세계대전

1947~1989 냉전

1914~1917 연방준비제도의 설립

1920~1939 대공황

1965 인플레이션 극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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