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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아무 날도 아닌 날] 최고운

armonioso 2017. 5. 18. 21:24

[아무 날도 아닌 날] 최고운

 

남녀관계가 이성이 아닌 편안한 무성의 친분으로 흘러가면,

스스럼없이 어울려 노는 것의 명분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관계는 성적매력을 전대로 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단지 'one of them'이 아니라

특별한 느낌을 발산할 수 있는 재주를 타고 났다면 모르겠지만,

그저 한 덩어리의 무리로 기억될 정도의 존재감으로 여기저기 휩쓸려 다니거나,

이성이 너무 쉽게 허물없이 대하도록 경계를 풀어서는 안 된다.


예외인 경우도 물론 있다.

아무리 선머슴 짓을 해도, 누나를 자처해도,

심지어 엄마처럼 굴어도 통하는 여자. 바로 예쁜 여자다.

예쁜 여자들은 오히려 그런 무성의 관계설정으로 남자의 마음을 쉽게 빼앗는다.



동요를 잘 부르고 동시 짓기를 좋아하던 모범적이던 소녀의 주량은

스무 살 신입생환영회에서 소주 일곱 병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먹고도 정신이 말짱해서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친구들은 술기운을 빌어 행하는 모든 '병신짓'의 낭만을 나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맨정신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른 사람들의 술 먹은 상태를 나는 안 먹은 상태로 디폴트시키자.

야호, 이것이 자유구나! 영혼에 날개를 달았다.


서른이 넘자 주량이 반으로 꺾였다. 이십 대 때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제는 필름도 끊긴다.

심지어 끊기고도 뻔뻔하게 "어쩌라고?"를 외치게 되었지만,

그렇게 해도 어절 수 없이 다음날 아침 방구석의 무정부적 상태를 마주하는 순간이면

밀려드는 알 수 없는 공포에 떨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현실에서의 작업 멘트란 건 아무래도 시시하기 짝이 없다.

'추운데 몸 좀 녹이고 가자' '술 깨고 가자'

아니면 '방 잡고 술 마실까'를 지나 '손만 잡고 잘게'로부터 이어져 '오빠 못 믿니'까지.



아픈 사람들은 좀 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나빠질 필요가 있다.

잘 되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남한테 화를 낼 필요가 있다.

교회 같은데 다니면서 용서만 구하지 말고, 제발 너를 분노하게 하는 대상에게 욕을 퍼붓기를.


착한 여자는 죽어서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살아서 어디든 간다.


로또도 맨날 광만 나오는 인생이면서,

대체 뭘 믿고 사후세계에 배팅을 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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