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독서

[사랑해 파리] 황성혜

armonioso 2017. 5. 19. 02:00
[사랑해 파리] 황성혜

 

 

영화 <사브리나>에 이런 대목이 있다.

"4마일쯤 되는 센 강가의 산첵로를 걷다 보면 파리에 있는 모든 다리를 지나게 돼요. 마냥 걷다가 마음에 드는 다리를 만나면 커피를 들고 가서 일기를 썼어요. 그리고 강이 말하는 소리르 들었지요."

강이 무슨 말을 했느냐는 질문에, 사브리나는 "그건 비밀"이라며 웃는다. 강이 말하는 소리라. 영화를 보다가 그 순간, 뜨거운 기운이 목으로 올라왔다. 그러면 센 강이 내게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센 강이 있는 곳은 12세기 말 바이킹 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세식 성을 세웠던 자리라고 한다. 지금 그 성벽들은 사라졌지만, 센 강만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곁에 아무도 없고 그래서 뭔지 모르게 마음이 텁텁해질 때, 그는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런 파리의 명물 거리지만 사실 샹젤리제만큼 '파리적'이지 않은 곳도 없다. 고집스러우리만큼 자기의 빛깔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파리에서, 이 거리는 가장 인터내셔널하고 멋없는 관광지다.

 

아닌 게 아니라 샹젤리제에 사무실이 있지도 않으면서 있는 척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한다. 이렇게 '샹젤리제 프리미엄'을 노린 사람들을 위한 비즈니스도 있다. 명함에 적힌 샹젤리제 주소로 배달된 우편물을 처리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실제 있지도 않은 '유령 사무실'관리업인 셈이다.

외국인이 바글거리는 곳을 파리지앵이 좋아할 턱이 없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인 친구들과는 한 번도 그곳에서 약속을 하거나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대신 한국에서 온 가족이나 친구, 지인과 찾았다.

 

샹젤리제 거리를 산책한다

낯선 사람들에게도 내 마음은 열리고

아무나하고나 인사를 하고 싶어진다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해가 비치나 비가 내리나 낮이나 밤이나

샹젤리제에는 당신이 필요로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있다네

-샹송 <레 샹젤리제> 중에서-
그곳에는 정말 그 모든 것이 다 있었다.

 

하여튼 이제는 다 이해가 된다. 수영복을 파는 프랑스 휴양지 상점에서 윗도리 없이 아랫도리만 색깔별로 늘어놓은 이유를 이제 알 것도 같다. 실내 체육관에서도 가슴을 내놓고 선탠 하는데 바닷가까지 가서 굳이 비키니 윗도리를 입을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

실내 체육관에서도 토플리스 차림의 여성을 만날 수 있는 파리지만, 최근 센 강변에 마련한 '인공 해변'에서의 토플리스 차림을 금지한다며 노출 정도를 규제하고 나섰단다. 관광객이 바글거리는 세계적인 장소는 '우리만의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일까.

 

반복되는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탈출은 언제나 즐겁다. 복닥거리는 일상으로 되돌아와도 여행의 힘 덕분에 한동안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랑의 묘약'이 아니라 '여행의 묘약'. 그걸 난 믿는다.

오늘 이 순간, 여행을 떠난다. 프랑스 남부 코트 다쥐르로 떠나는 리용 기차역에 가니 낯익은 안내방송이 웅웅거린다. 서점에서 잡지 몇 권을 산 뒤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신다. 기차 출발 시간이 다가온다. 자, 기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행이 끝난 뒤 나는 여행 전의 나와 또 달라져 있겠지. 여행은 이렇게 또 시작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ㅇ낳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진리뿐이다. 너무나도 프랑스적이고 엘리트주의인 그랑제콜도 2~3년 전부터 변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닫힌 프랑스 안에 있으면 죽고, 열린 세계의 문밖으로 나가야 살아남을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프랑스의 리더'가 아니라 '글로벌 리더'를 키워내려고 한다. 가히 '21세기 프랑스 혁명'이라 할 만하다.

 

로마는 스스로 노력해서 생산할 줄 모르는 불멸의 고급 콜걸 같다. 언제나 남자의 사랑을 받아왔고 사치의 극치를 맛본 여자처럼, 뒤따라오는 파리나 런던이란 이름의 애송이에게 인기가 모여도 별로 슬퍼 보이지 않는다. 남자들의 관심을 사려고 '문화의 중심은 여기입네'하고 선전하기에 긍긍하지도 않는다. -시오노 나나미의<이탈리아에서 보내온 편지> 중

 

프랑스어로 '미장센'은 우리말로 하면 '연출 장치'쯤 될 것 같다. 좁은 의미로는 연극 같은 무대에서 무엇을 올려 타인에게 보여주는 기술이다. 프랑스 정치, 경제, 사회 그 어느 곳에도 이 미장센 장치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고도로 발달되고 발휘되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문화에서다.

 

시작이 황홀했던 만큼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비참해진 연인 관계가 왜 없겠고, 돈 때문에 뒤도 안 돌아보고 싶을 만큼 엇나가버린 관계가 왜 없겠나. 지금 이순간에도 파리는 두 커플이 허물어진 자리에 새 커플이 탄생하고, '교통사고'처럼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사랑을 꿈꾸는 외로운 싱글이 숱하다.

 

댓글